내 생애 첫 게임기, 재믹스 V — 자낙과 마성전설 그리고 합팩의 추억

어린 시절 처음 만난 게임기 대우 재믹스 V. 자낙을 플레이하던 아버지, 고모들이 사준 마성전설, 합팩과 오락실까지 그 시절의 게임 추억을 돌아봅니다.

내가 처음 가졌던 게임기는 닌텐도도, 세가도 아니었다.

대우전자의 재믹스였다.

너무 어렸던 시절이라 재믹스가 정확히 언제, 어떻게 우리 집에 들어왔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게임기와 함께했던 몇몇 장면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선명하게 남아 있다.

눈알처럼 보이던 자낙의 보스, 내가 가보지 못했던 스테이지까지 척척 넘어가던 아버지, 고모들이 사주셨던 마성전설, 그리고 게임을 오래 하면 TV가 고장 난다는 부모님의 말씀까지.

나중에는 게임이 잔뜩 들어 있던 합팩도 생겼고, 친구들이 우리 집에 놀러 오면 재믹스를 부러워하기도 했다.

그렇게 좋아했던 게임기를 중학생이 되어서는 재미없다며 그냥 버려버렸지만 말이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내 게임 인생은 그 검은색 재믹스에서 시작됐다.

어린 시절 사용했던 검정색 대우 재믹스 V 블랙 모델
어린 시절 내가 사용했던 검정색 재믹스 V를 바탕으로 재현한 이미지.

내 첫 번째 게임, 자낙

내가 처음 가지고 있었던 재믹스 게임팩은 자낙(Zanac)이었다.

자낙은 1986년 MSX용으로 등장한 종스크롤 슈팅게임이다.

하지만 어린 나에게 제작사나 출시연도 같은 것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그저 재믹스에 팩을 꽂고 전원을 켜면 시작되는, 내가 가지고 있던 게임이었다.

자낙에서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보스였다.

보스전에 들어가면 동그란 포탑 같은 것들이 여러 개 붙어 있었는데, 어린 내 눈에는 그것들이 전부 눈알처럼 보였다.

그래서 당시에는 정확한 이름도 모르면서 그저 ‘눈알이 엄청 많은 보스’라고 생각했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자낙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그 눈알처럼 생긴 포탑들이 생각난다.

나보다 자낙을 잘했던 아버지

자낙에는 게임 자체만큼이나 기억에 남는 장면이 하나 더 있다.

아버지도 가끔 자낙을 플레이하셨다.

나는 얼마 가지 못하고 죽기 일쑤였는데, 이상하게 아버지가 조이스틱을 잡으면 달랐다.

내가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스테이지까지 계속해서 넘어가셨다.

어린 나는 옆에 앉아서 그 모습을 구경하며 생각했다.

‘어떻게 저기까지 가지?’

내가 직접 플레이하는 것도 재미있었지만, 아버지가 내가 보지 못했던 새로운 스테이지를 플레이하는 모습을 옆에서 구경하는 것도 재미있었다.

지금 자낙을 생각하면 게임 화면만 떠오르지 않는다.

TV 앞에서 조이스틱을 잡고 계시던 아버지의 모습도 함께 떠오른다.

말을 안 듣던 조이스틱과 아버지

재믹스와 함께 사용했던 조이스틱도 기억난다.

스틱으로 방향을 움직이고 버튼 두 개를 누르는 단순한 형태였다.

대우 재믹스 V 조이스틱 컨트롤러
어린 시절 조작이 잘되지 않을 때면 아버지가 직접 분해해 알코올로 접점을 닦아주시던 재믹스 조이스틱을 재현한 이미지.

오랫동안 사용하다 보면 어느 순간 방향이 제대로 입력되지 않거나 버튼이 말을 잘 듣지 않을 때가 있었다.

그러면 아버지가 조이스틱을 가져가 직접 분해하셨다.

안쪽을 열어 알코올로 접점 부분을 깨끗하게 닦아주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린 나는 아버지가 안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청소를 마친 조이스틱을 다시 연결하면 조금 전까지 말을 듣지 않던 조작이 다시 잘됐다.

그러면 나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TV 앞에 앉아 자낙을 시작했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 생각해보면 자낙에 대한 기억에는 게임만 있는 것이 아니다.

눈알처럼 보였던 보스의 포탑, 내가 가지 못했던 스테이지까지 넘어가던 아버지, 그리고 고장 난 줄 알았던 조이스틱을 분해해서 다시 움직이게 해주시던 모습까지.

어쩌면 그래서 자낙은 내게 단순히 ‘처음 가지고 있던 게임’ 이상의 기억으로 남아 있는지도 모르겠다.

게임 오래 하면 TV가 고장 난다?

그렇게 좋아했던 재믹스였지만 마음껏 게임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부모님께서는 내가 게임을 오래 하고 있으면 종종 이런 말씀을 하셨다.

“게임 오래 하면 TV 고장 난다.”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오지만 그때의 나는 너무 어렸다.

그래서 그 말을 진짜로 믿었다.

게임을 조금 오래 했다 싶으면 정말 TV가 고장 나는 건 아닐까 걱정했다. 재믹스를 계속 하고 싶으면서도 TV가 망가질까 봐 눈치를 보며 게임을 끄기도 했다.

지금이야 부모님께서 어린 나의 게임 시간을 줄이려고 하신 말씀이었겠거니 생각하지만, 당시의 나에게는 꽤 무서운 경고였다.

돌이켜보면 이것도 그 시절에만 가능했던 추억인 것 같다.

요즘 아이에게 “게임 오래 하면 TV 고장 난다”고 말하면 아마 검색부터 해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부모님 말씀을 철석같이 믿었다. TV가 고장 나면 재믹스도 못 하니까.

고모들이 사준 마성전설

그러던 어느 날 새로운 게임팩이 생겼다.

고모들이 사주신 마성전설(Knightmare)이었다.

새로운 게임팩 하나가 생긴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기쁜 일이었다.

마성전설은 코나미가 1986년 MSX용으로 출시한 종스크롤 슈팅게임이다.

MSX 마성전설 Knightmare 1986 타이틀 화면
마성전설 MSX판 타이틀 화면. 직접 플레이 및 캡처.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너무 어려웠다.

어린 시절의 나는 아무리 반복해서 플레이해도 2스테이지 정도가 한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죽으면 다시 시작하고, 또 죽으면 다시 도전했다. 당시에는 가지고 있는 게임팩이 많지 않았으니 어렵다고 해서 다른 게임으로 쉽게 넘어갈 수도 없었다.

MSX 마성전설 1스테이지 플레이 화면
어린 시절 수없이 반복했던 마성전설의 초반 스테이지. 직접 플레이 및 캡처.

그리고 이 글을 쓰면서 정말 오랜만에 마성전설을 다시 플레이해봤다.

세월도 많이 흘렀고 그동안 수많은 게임을 해왔으니 이번에는 어린 시절보다 훨씬 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결과는?

또 2스테이지에서 다 죽었다.

MSX 마성전설 1스테이지 보스 전투 화면
수십 년 만에 다시 도전한 마성전설 1스테이지 보스전. 직접 플레이 및 캡처.

수십 년 전의 내가 유난히 못했던 게 아니라 그냥 마성전설이 어려운 게임이었던 것으로 해두자. ㅋㅋ

그래도 오랜만에 직접 플레이해보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픽은 지금 보면 단순하지만 캐릭터를 움직이고 적의 공격을 피하다 보니 어린 시절 TV 앞에 앉아 게임하던 기억이 금방 되살아났다.

결국 이번에도 2스테이지를 넘지 못했지만, 어쩌면 그래서 더 반가웠는지도 모르겠다.

하나둘 늘어나기 시작한 게임팩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 집에도 게임팩이 하나둘 늘어나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하면 몇 개 되지도 않았겠지만, 당시에는 새로운 게임팩 하나가 생기는 것만으로도 놀거리가 엄청나게 늘어난 기분이었다.

새 팩을 재믹스에 꽂고 처음 보는 화면이 나타나는 순간이 그렇게 좋았다.

게임 설명서를 꼼꼼하게 읽고 시작했던 것도 아니다.

일단 시작한다.

버튼을 눌러본다.

죽는다.

그리고 다시 한다.

그렇게 직접 부딪쳐가며 게임하는 방법을 배웠다.

그리고 나타난 최고의 게임팩, ‘합팩’

그러다가 어느 날 이른바 ‘합팩’이라는 것도 가지게 됐다.

하나의 게임팩 안에 여러 게임이 들어 있는 카트리지였다.

지금이야 당시 유통되던 합팩이 정식 라이선스를 거치지 않은 비공식 제품인 경우가 많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어린 시절의 나는 그런 사실을 알 리가 없었다.

그때 내 눈에 중요한 건 딱 하나였다.

“팩 하나에 게임이 이렇게 많이 들어 있다고?”

처음 합팩을 접했을 때는 정말 보물이라도 얻은 것 같았다.

게임 하나가 생기는 것만으로도 좋았던 시절인데, 팩 하나를 꽂았더니 여러 게임을 골라서 할 수 있었으니 어린 나에게는 그야말로 최고의 게임팩이었다.

게임 이름도 모르면서 그렇게 재미있었다

합팩에 들어 있던 게임 중 지금까지 기억나는 것만 해도 꽤 많다.

남극탐험, 원더보이, 양배추인형, 서커스 찰리, 쿵푸….

하지만 재미있는 것은 당시에는 이런 게임들의 정확한 제목조차 제대로 몰랐다는 것이다.

화면에 영어로 제목이 표시되어도 어린 나는 영어를 제대로 읽지 못했다.

그래서 게임 이름보다는 게임 속 장면으로 기억했다.

남극탐험은 펭귄이 달리는 게임.

서커스 찰리는 서커스 하는 게임.

쿵푸 게임은 그냥 쿵푸 게임이었다.

정확한 제목이나 제작사를 몰라도 게임을 즐기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하나를 실행해서 재미있으면 계속하고, 질리면 다른 게임을 실행했다.

인터넷 공략도 없었고 유튜브 영상도 없었다.

처음 보는 게임이라도 일단 실행하고 버튼을 눌러보면서 방법을 알아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당시 게임들은 제목보다 화면을 봤을 때 기억이 먼저 돌아오는 경우가 많다.

얼음 위를 달리던 펭귄, 서커스 무대에서 묘기를 부리던 캐릭터, 화면 속에서 주먹과 발차기를 주고받던 모습….

어린 시절에는 이름조차 제대로 몰랐던 게임들이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기억 속에 남아 있다.

그래도 결국 오락실에 갔다

재믹스에 게임팩도 하나둘 늘어나고, 나중에는 여러 게임이 들어 있는 합팩까지 생겼다.

어린 나에게는 집에 작은 오락실이 생긴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그렇게 게임이 많아져도 어느 순간에는 또 새로운 게임이 하고 싶었다.

그리고 결국 나는 오락실로 향했다.

집에 게임기가 있는데도 굳이 돈을 들고 오락실에 갔다.

당연히 부모님께 걸리면 혼났다.

지금 생각하면 재믹스가 있으면서 왜 그렇게 오락실까지 가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집에서 하는 게임과 오락실에서 하는 게임은 뭔가 달랐다.

화려한 화면과 큰 소리, 줄지어 놓여 있던 게임기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플레이하는 모습을 뒤에서 구경하는 것까지.

어린 나에게 오락실은 또 다른 세상이었다.

친구들이 부러워했던 우리 집 게임기

반대로 친구들이 우리 집에 놀러 오면 인기의 중심에는 재믹스가 있었다.

지금처럼 누구나 게임기나 스마트폰을 가지고 있던 시절이 아니었다.

그래서 집에서 게임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친구들에게는 꽤 부러운 일이었던 것 같다.

친구들과 TV 앞에 모여 앉아 게임을 하고, 누군가 죽으면 다음 사람이 조이스틱을 잡았다.

돌이켜보면 거창한 것도 없었다.

TV 한 대와 재믹스 한 대, 그리고 몇 개의 게임팩이 전부였다.

하지만 그때의 우리에게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우리 집은 잠깐씩 작은 오락실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그 재믹스를 버렸다

그렇게 좋아했던 재믹스를 꽤 오랫동안 가지고 있었다.

기억으로는 중학생이 될 때까지 집에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더 새로운 게임들을 접하게 되었고, 어느 순간 재믹스는 더 이상 재미있는 게임기가 아니게 됐다.

그리고 어느 날,

나는 그 재믹스를 그냥 버렸다.

게임기 본체도, 조이스틱도 그때는 오래된 물건일 뿐이었다.

언젠가 다시 찾게 될 거라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내 첫 게임기는 너무 허무하게 사라졌다.

수십 년 뒤 다시 찾아본 재믹스

세월이 한참 흐른 뒤 문득 재믹스가 생각나 중고 매물을 검색해본 적이 있다.

그런데 가격을 보고 깜짝 놀랐다.

내가 검색했을 당시에는 상태 좋은 재믹스가 100만 원이 넘는 가격으로 올라온 매물도 보였다.

그 순간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역시 이것이었다.

‘아… 그걸 왜 버렸지?’

물론 중고 사이트에 올라온 가격이 실제 거래가격과 같다는 뜻은 아니다.

그리고 지금 생각하면 가격보다 더 아쉬운 것도 있다.

내가 어린 시절 직접 만졌던 재믹스, 아버지가 분해해서 고쳐주시던 조이스틱, 자낙과 마성전설을 꽂아 수없이 플레이했던 바로 그 물건을 지금까지 가지고 있었다면 어땠을까.

아마 돈으로 따지기 어려운 물건이 되어 있었을 것이다.

내 게임추억의 시작, 재믹스

이 글을 쓰기 위해 오랜만에 재믹스와 그 시절 게임들을 다시 찾아봤다.

잊고 있었던 게임 이름도 다시 확인했고, 마성전설은 직접 플레이해보기도 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나는 수십 년 전과 똑같이 2스테이지에서 죽었다. ㅋㅋ

하지만 게임을 다시 들여다보면서 더 많이 떠오른 것은 게임 자체가 아니었다.

자낙을 나보다 훨씬 잘했던 아버지.

말을 듣지 않는 조이스틱을 분해해 알코올로 닦아주시던 모습.

게임을 오래 하면 TV가 고장 난다는 말을 진짜로 믿었던 어린 나.

고모들이 사주셨던 마성전설.

이름도 모르면서 신나게 골라 했던 합팩의 게임들.

그리고 우리 집에 놀러 와 재믹스를 부러워하던 친구들.

게임기는 오래전에 사라졌다.

하지만 그 게임기와 함께했던 기억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생각해보면 내가 지금까지 게임을 좋아하게 된 시작점에는 언제나 그 게임기가 있었다.

검은색 본체에 양쪽으로 노란색과 파란색이 들어가 있던 작은 게임기.

내 게임추억의 시작은 아마 그 재믹스 V였던 것 같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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